조선일보와 한겨레는 정말 다른 신문일까?

‘신문의 위기’라는 단어가 그리 어색하지 않게 됐다. 그만큼 위기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이다. 산업적 측면에서 보자면, 신문은 다른 신문사들과 경쟁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미디어와 경쟁하고 있다. 포털, 블로그, SNS를 포함해 콘텐츠를 생산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경쟁상대다. 경쟁의 구도와 스케일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신문이 제공하는 정보는 인터넷을 떠도는 수많은 정보들 중 하나일 뿐이다. 적지 않은 경우에는 심지어 질이 떨어지는 ‘저급 정보’이기도 하다.

위기의 원인과 해결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희소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차별성 있는 콘텐츠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한국 신문들에게도 그게 있기는 하다. 조선일보와 한겨레는 분명 다르다. 다만 그 때의 ‘차별성’은 대부분 ‘관점의 차별성’에 기인할 뿐이다. 내용은 똑같은데 단지 관점만 달리한 기사들이 조선일보와 한겨레를 구분한다. 흔히 이념, 색깔이라고 부르는 것들 말이다.

제호는 다른데...

제호는 다른데…

결국 한국의 정치 기사는 동일한 취재원, 균질한 뉴스 품질, 서로 다른 야마를 특징으로 한다. 야마만 다른, 즉 사안을 다루는 태도만 다른 뉴스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이로부터 한국의 언론이 좌우 축선에 늘어서 경쟁하는 시장이 형성됐다. 여러 언론이 다루는 이슈와 그 취재원이 대동소이하므로 (뉴스라는) 제품의 차별성은 이를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로만 가능하다.

좌우 축선에 늘어선 한국 언론은 끈질기게 진실을 추적하는 대신 ‘정치의 호흡으로’ 사실을 다룬다. 정치가 다루는 진실의 생명력은 길지 않다. 정당은 상대를 공격할 때만 진실을 앞세운다. 권력 장악에 도움 되지 않는다면 진실 추적을 미루거나 접는다. 필요하다면 거짓도 관용한다.

(중략)

악순환은 이어진다. 진실이 무엇인지 확증할 자신이 없으므로 언론은 진실의 자리를 주장, 의혹, 공방으로 대체한다. 진실을 확보하지 못한 언론은 정치적 프레임으로 뉴스를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진실 추적의 수고를 더는 일이기도 하므로 한국의 기자들은 그런 관성에 길들여진다. 입으로 균형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기대어 의지할 편파를 찾거나 기껏해야 회색지대로 진입한다.
안수찬, [뉴스가 지겨운 기자] 43-45쪽

물론 ‘종합일간지’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생각해보면, ‘색깔’이 아니라 나름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신문도 더러 있다. IT, 경제, 스포츠, 연예, 미디어 등 각종 전문지들이다. 그러나 그런 매체들이 해당 분야에서 얼마나 전문적인지, 얼만큼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해선 많은 경우 물음표가 붙는다. ‘전문지’를 표방하는 매체들 중 상당수는 하나같이 소위 ‘정경사문’ 영역으로의 확장을 추구한다. 전문적으로 다룬다던 영역의 깊이는 얕아지고, 차별성은 사라진다.

‘차별성’을 확보하는 것, 이게 말이 쉽지 절대 쉽지 않다. 전문지를 자처하는 신문들이 문어발식 확장을 추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편이 더 쉽기 때문이다. 기자는 전문가가 아니다. 차별화된, 다시 말해 ‘업계’에서도 인정 받는 고품질의 기사를 쓰려면, 기자가 스스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당연히 기자 개인이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자를 전문가로 길러내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돈과 시간은 물론, 혁신이 필요한 일이다.

여기서의 ‘체계적인 시스템’이란 단지 훌륭한 재교육 시스템을 갖추고 하는 것들에 그치지 않는다. 뉴스를 생산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함을 의미한다. ‘전문기자’들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기자들은 출입처에 묶여 있다. 물론 출입처에서도 해당 분야를 깊게 파고든 전문기자가 종종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출입처란 대개 ‘물 먹지 않기’가 최우선 과제가 되는 공간이다. 애초에 차별성 있는 콘텐츠가 나오길 기대하기 어려운, 평준화된 구조다.

‘정경사문’으로 고착화된 한국 신문사의 카테고리 구조는 출입처 영역의 공통화로 차별적 정보 생산 자체를 가로막고 있다. 국내 언론사가 생산하는 기사의 70~80%는 동일 아이템을 거의 동질적으로 배열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A언론사와 B언론사를 구별하는 유일한 기준은 독자들에게마저 차별적 인사이트를 제공하지 못하는 의미 없는 인용 코멘트의 차별성에 불과하다.(소위 쌀로 밥짓는 코멘트가 대다수) 출입처발로 생산되는 기사에서 희소 가치를 찾지 못하는 현재 상황은 독자에게도 광고주에게도 어떤 매력과 가치를 제공해주지 못한다.

(중략)

포맷의 틈새화는 스트레이트 위주의 기사에서 내러티브 위주의 기사로 기사의 형태 및 유형에 따라 재희소화하는 전략이다. 동일 카테고리에서 동일 스트레이트 포맷으로 가치를 덧대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미 관련 스트레이트 기사를 생산하는 뉴스 미디어는 넘치고도 넘친다. 왜 류현진 경기 뒤 민훈기의 기사를 기다리는 이들이 포털에 넘쳐나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민훈기씨의 기사 아래에는 긍정적 댓글이 수없이 달린다.‘기레기’ 따위의 비아냥거림은 찾아볼 수 없다.

이성규, [‘재희소화’로 풀어본 신문사가 살아남는 법] (링크)

앞서 인용한 안수찬 기자도 그렇고, 위의 인용문에서도 ‘내러티브’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역삼각형 구조의 천편일률적인 스트레이트 기사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한겨레21의 ‘노동OTL’ 시리즈가 그렇고, 한겨레에 연재됐던 ‘표창원의 죄와 벌’도 그런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동아일보의 ‘내러티브 리포트’나 과거 중앙일보의 ‘루게릭 눈으로 쓰다’* 시리즈도 그런 시도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여전히 ‘실험실’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극단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신문사에서 스트레이트 기사가 꼭 필요한 경우라면, 연합뉴스나 뉴시스, 뉴스1 같은 뉴스통신사에서 가져다 써도 된다고 생각한다.** 연합뉴스의 사건사고 기사에 대해 조선일보, 또는 한겨레의 사건사고 기사가 차별성을 갖는 경우는 새로운 팩트를 발굴하거나 풍부한 맥락을 곁들여 깊이를 더할 때 뿐이다. 그건 꼭 같은 출입처에 묶여 있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다. 스트레이트를 기본 재료로 삼아 취재를 더하고, 스토리를 입히면 된다.

'관점'을 살 것인가? (사진 출처는 http://databackup.egloos.com/3755589)

‘관점’을 살 것인가? (사진 출처는 http://databackup.egloos.com/3755589)

당장 출입처에서 철수하는 게 어렵다면, 출입처에는 최소한의 인력을 남겨두는 편이 낫다. 나머지는 사안에 따라 각자의 관심과 능력, 나름의 전문 분야에 따라 헤쳐 모이는 식으로 기자들을 사실상의 ‘프리롤(Free Role)’ 형태로 배치 하는 건 어떨까. ‘출입처가 없으니 뭘 써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겠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출입처 밖에는 뉴스가 넘쳐난다. 스트레이트에는 미처 담아내지 못한, 새롭게 발굴하고 연결해야 할 팩트와 맥락들이 거기에 있다.

뉴스는 더 이상 ‘새롭고 충격적인 사실’이 아니다. 모두 알고 있지만 제대로 모르고 있는 사실이 뉴스다. 이를 드러내는 능력이 곧 기자의 자질이다. 어떤 기자는 내러티브, 다른 기자는 분석해설, 또 다른 기자는 조사통계 등 그 무기는 각자 다를 수 있지만 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가는 각자의 방법론을 갖추고 있어야 기자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자의 자격 요건도 변화한다. 공부하고 성찰하고 사색하는 기자가 유능한 기자다. 기자 역할의 중심은 여러 사실을 쉼 없이 전달하는 속보 전달자가 아니라 수많은 사실의 맥락을 분별하고 분석하는 해석자에 있다. 기자는 사실의 전달자를 넘어 감각, 경험, 지성, 지혜의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 넘쳐나는 사실들을 체계적으로 엮기 위해 기자는 ‘르네상스적 인간형’의 마지막 보루가 되는 게 옳다.

안수찬, [뉴스가 지겨운 기자] 271쪽쪽

조선일보와 한겨레는 정말 다른 신문일까? 사안에 따라 조금씩 관점을 달리 한다는 점에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차별화된 품질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단순한 관점의 차이 만으로 두 신문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두 상품의 차이가 ‘색깔’ 뿐이라면, 그걸 위해 흔쾌히 돈을 지불하려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관점의 차이 만으로는 품질이 보장되지 않는다.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품질을 제대로 끌어올릴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혁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 카테고라이징이 엉망이다. 시리즈 전체를 묶어 놓은 URL은 고사하고, 심지어 중앙일보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도 제대로 다 검색이 안 된다. 시간이 좀 지난 기사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홈페이지 메뉴 구성을 보면 그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콘텐츠가 좋으면 뭐하나. 참 답답한 일이다.

** 품질이 썩 만족스럽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건 계약 상대방인 뉴스통신사들을 꾸준히 압박하면 어느 정도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지금은 통신사와 신문사가 똑같은 시장을 놓고 경쟁하고 있는 무척 기이한 구조인데, 이런 아사리판이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신문사는 ‘고객’의 입장에서 더 질 높은 뉴스상품을 통신사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 통신사는 고객인 신문사의 다양한 니즈에 맞춰 뉴스 상품을 차별화하고 다양하게 패키징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게 싫으면 ‘통신사’는 떼버려야지… (연합뉴스는 정부 돈도 반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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